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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운 최치원
 
 
 

최치원(崔致遠)

857(문성왕19)-?신라말기의 학자. 문장가. 본관은 경주(慶州).자는 고운(孤雲) 또는해운(海雲).경주사량부(沙梁部,혹은 本彼部) 출신. 견일(肩逸)의 아들이다.
신라 골품제에서 6두품(六頭品)으로 신라의 유교를 대표할만한 많은 학자들을 배출한 최씨 가문출신이다. 특히 최씨 가문 가운데서도 이른바 실라말기  3 최 의 한사람으로서 새로 성장하는 6두품 출신의 지식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세계(世系)는 자세히 알수 없으나 아버지 견일은 원성왕의 원찰인 숭복사(崇福寺)의 창건에  관계하였다. 최치원이 868년 (경문왕8)에 12세 어린 나이로 중국 당나라에 유학을 떠나게 되었을 때 아버지 견일은 그에게 “10년 동안에 과거에 합격지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다 ”라고  격려 하였다한다.
이러한 이야기는 뒷날 최치원 자신이 6두 품을 득난(得難)이라고 한다고 하여 자랑스럽게 말하고 있었던 점과 아울러 신흥가문의 출신의 기백을 잘 나타나있다. 당나라에 유학한지 7년 만에 874년에 나이로 예부시랑 (禮部侍郞) 배찬이 주관한 빈공(賓貢/외국인이 과거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의 자격으로 과거시험에 합격하였다. 그리고 2년 간 낙양(洛陽)을 유랑하면서 시작(詩作)에 몰두하였는데. 그때 지은 작품이<금체시 今體詩)5수1권<오언칠언금체시 五言七言今體詩>100수1권<잡시부 雜詩賦>30수1권 등이다.
그 뒤 876(헌강왕2)년 당나라의 선주(宣州)율수헌위(?水縣尉)가되었다. 이때 공사간(公私間)에 지은 글들을 추려 모은 것이 <중상복궤집 中山覆?集)1부5권이다 그 뒤 887년 겨울 율수위를 사직하고 일시 경제적 곤란을 받게되었으나 양양 이위의 문객이 되었고 곧 이서 회남절도사(淮南節度使) 고변(高?)의 추천으로 관역순관(館驛巡官) 이 되었다.
그러나 명문을 천하에 떨치게된 것은 879년 황소(黃巢)가 반란을 일으키자 고변이 제도행영병마도통(諸道行營兵馬都統)이 되어 이를 칠 때 고변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서기의 책임을 맡으면서부터였다.
그 뒤 4년 간 고변의 군막에서 표(表). 장(狀). 서계(書啓). 격문(檄文)등을  제작하는 일을 맡게되었다. 그 공적으로 879년 승무랑 전중시어사내공봉(承務郞 殿中侍御使內供奉)으로 도통순관(都統巡官)에 승차되며, 겸하여 포장으로 비은어대 (緋銀魚袋)를 하사 받았으며, 이어882년에는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 받았다.
고변 의 종사관으로 있을 때, 공사간에 지은 글이 표. 장. 격.(檄) 서(書). 위곡(委曲) 거첩(擧牒) 제문(祭文). 소계장(疏啓狀) 잡서(雜書)시 등 1만여 수에 달하였는데, 귀국 후 정선하여<계원필경(桂苑筆耕)> 20권을 이루게 되었다. 이 가운데 특히 토황소격(討黃巢檄)은 명문으로 이름이 높다.885년 귀국할 때까지 17년 동안 당나라에 머물러 있었는데 그동안  고운(顧雲),나은(羅隱) 등 당나라의 여러 문인들과 사귀어 그의 글재주는 더욱 빛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당서(唐書)예문지(藝文志)에도 그의 저서 명이 수록되게되었는데 이규보는 동국이상국집 22권 잡문(雜文)의 당서에 최치원 전을 세우지 않은데 대한 논의 에서 <당서>열전에 최치원의 전기가 들어있지 않은 것은 중국인들이 그의 글재주를 시기한 때문일 것이라고 까지 말하고 있다.
29세로 신라에 돌아오자 헌강왕에 의하여 시 독 겸 한림학사 수병부 시랑 지서 서 감사 (侍讀 兼 翰林學士 守兵部 侍郞 知瑞 書 監事)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국내에서도 문명을 떨쳐 귀국한 다음해에 왕명으로 대숭복사 비문(大崇福寺碑文)등의 명문을 남겼고  당나라에서 지은 저작들을 정리하여 국왕에게 진헌하였다.
그러나 당시 신라사회는 이미 붕괴를 눈앞에 두고 있었는데 무엇보다도 지방에서 호적세력이 대두하면서 중앙정부는 주(州)군(郡)의 공부(貢賦)도 제대로 거두지 못하여 국가의 창고가 비고, 재정이 궁핍한 실정이었다.
889년(진성여왕3)에는 마침내 주, 군의 공부를 독촉하자 농민들이 사방에서 봉기하여 전국적인 내란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에 최치원은895년 전국적인 내란의 와중에서  사찰을 지키다가 전물 한 승병들을 위하여 만든 해인사 경내의 한 공양탑(供養塔)의 기문(記文)에서“당토(唐土)에서 벌어진 병(兵)흉(凶)두 가지 재앙이 서쪽 당에서는 멈추었고, 동쪽 신라로 옭겨져 와서 그 험악한 중에도 더욱 험악하여 굵어서 죽고 전쟁으로 죽은 시체가 들판에 별처럼 흐트러져 있었다” 고 당시의 처참한 상태를 적었다. 
당나라에서 직접 황소의 반란을 체험 바 있는 그에게는 고국에서 벌어지고 있던 전쟁과 재난이 당나라의 것이 파급, 연장된 것으로 느껴졌던 모양으로, 당대 제일의 국제통 (國際通)다운  시대감각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귀국한 뒤 처음에는 상당한 의욕을 가지고 당나라에서 배운 경륜을 펴보려 하였으나, 진골귀족 중심의 독점적인 신분체제의 한계와 국정에 문란함을 깨닫고 외직(外職)을 원하여 890년에 대산군(大山郡:지금의 전라북도 태인)천령군(天嶺郡:지금의 경상남도 함양)부성군(富城郡:지금의 충청남도 서산) 등지의 태수를 역임하였다.
부성군수로 있던893년 하정사(賀正使)에 임명되었으나 도둑들의 횡행으로 가지 못하고 , 그 뒤에 다시 사신으로 당나라에 간 일이 있다. 894년에는 시무책(시무책) 10조를 진성여왕 에게  올려서 문란한 정치를 바로잡으려고 노력하기도 하였다.
10여 년 동안 중앙의 관직과 지방관직을 역임하면서, 중앙 진골귀족의 부패와 지방 세력의 반란 등의  사회모순을  직접적으로 목격한 결과 그 구체적인 개혁안을  직접 적으로 목격한 결과 그 구체적인 개혁안을 제시하기에  이른 것이다. 
시무책은 진성여왕 에게 받아들여져서 6두 품의 신분으로서는 최고의 관등인 아찬(阿?)에 올랐으나  그의 정치적인 개혁안은 실현될 수 없는 것이었다. 당시의사회모순을 외면하고 있든 진골귀족들에게 그 개혁안이 받아들여질 리는 만무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얼마 아니 되어 실정을 거듭 하든 진성여왕 이 즉위한지 11년 만에 정치문란의 책임을 지고 효공왕 에게 선양(禪讓)하기에 이르렀다.
최치원은 퇴위하고자 하는 진성여왕과 그 뒤를 이어 새로이 즉위한 효공왕을 위하여  각 각  대리 작성한 상표문(上表文)에서 신라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멸망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던 것을 박진감 나게 묘사하였다. 이에 이르자 최치원은 신라왕실에 대한 실망과  좌절감을  느낀 나머지 40여세 장년 의 나이로 관직을 버리고 소요자방(逍遙自放)하다가 마침내 은거를 결심하였다. 당시의 사회적 실현과 자신의 정치적 이상과의  사이에서 빚어지는 심각한 고민을 해결하지 못하고 결국 은퇴의 길을 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 같다.
즐겨 찾은 곳은 경주 남산 강주(剛州)지금의 의성의 빙산(氷山) 합천(陜川)의 청량사(淸?寺), 지리산의 쌍계사(雙磎寺) 합포현(合浦縣지금의 창원)의 별서(別墅)등 이었다고 하는데  이밖에도 동래의 해운대(海雲臺)를 비롯하여 그의 발차취가 머물렀다고 전하는 곳이 여러 곳 있다.
만년에는 모형(母兄)인 僧 현준(賢俊) 및 정현사(定玄師)와 도우(道友)를 맺고 가야산 해인사에 들어가 머물렀다. 해인사에서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 알 길이 없으나 , 그가 지은 신라 수창군호국성 팔각 등루기(新羅壽昌郡護國城八角燈褸記)에  의하면 908년 (효공왕12)말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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