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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운 최치원
 
 
 

생존하였던 것은 분명하다. 그 뒤의 행적은 전연 알수 없으나 물외인(物外人)으로 산수간에서 방랑하다가 죽었다고도 하며 혹은 신선이 되었다는 속설도 전해오고 있다.
삼국사기 최치원 전에 의하면 고려 왕건(왕건)에게 서한을 보냈는데 그 가운데 “계림은 시들어 가는 누런 잎이고 , 개경의 곡령은 푸른 솔(鷄林黃葉 鵠嶺靑松)”이라는 구절이 들어있어 신라가 망하고 고려가 새로 일어날 것을  미리 내다보고 있어 다고 한다. 최치원이 실제 왕건에게  서신을 보낸  사실이 있었는지  확인할 길은 없으나 , 그가 송악(송악)지방에서 새로 대두하고  있던 왕건 세력에  주목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은거하고있던 해인사에는 희랑(希朗)과 관혜(觀惠)등 두 사람의 화엄종장(華嚴宗匠)이 있어서 서로 정치적 견해를 달리하여 대립하고 있었다.
즉, 희랑은 왕건을 지지하는데 비하여 관혜는 견훤(甄萱)의 지지를 표방하고 있었다. 그 때에 최치원이 희랑과 교분을 가지고 그를 위하여 시 6수를 지어준 것이 오늘날까지 남아있다. 이로 보아 최치원은 희랑을 통해서도  왕건의 소식을 듣고 있었고  나아가 고려의 흥기에  기대를 걸었을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다.
그는 역사의 중심무대가 경주에서 송악지방으로 옮겨지고 또 그 주인공도 경주의 진골귀족이 몰락하는 대신에 지방의 호족세력이 새로 대두하고 있던 역사적 현실을 직접 눈으로 내다보면서 살다간 사람이었다.
비록 그 어느 편에도 적극 적으로 가담하여 사회적인 전환과정에서 주동적인 역할을 하지 못하고 이미 잔존세력에 불과하던 신라인으로 남아서 은거생활로 일생을 마치고 말았으나, 역사적 현실에 대한 고민은 그의 후계자들에게 영향을 주어 ,문인(門人)들이 대거 고려정권에 참가하여 새로운 성격의 지배층을 형성함으로써 신흥고려의 새로운 정치질서. 사회질서의 수립에 선구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한편 최치원이 살던 시대는 사회적 전환기일 뿐 아니라 그에 상응하는 정신계의 변화도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었는데 ,그는 정신계의 변화면에 있어서도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자신을 부유(腐儒) 유문말학(儒門末學)등으로 표현하였던 것으로 보아 학문의기본적 입장은 유학(儒學)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유학을 단순히 불교의 부수적인 것으로 이해하거나, 왕자의 권위수식에만  이용하던 단계를 지나 새로운 정치 이념으로 내세우면서, 골품제도라는 신라사회의 족적 편제방법(族的編制方法)을 부정하는 방향으로까지 발전시켰던 것이다. 유교에 있어서의 선구적 업적은 뒷날 손자인 최승로(崔承老)로 이어져 고려국가의 정치이념으로 확립을 보기에 이르렀다. 
그는 유교사관(儒敎史觀)에 입각해서 역사를 정리하였는데,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연표형식으로 정리한 제왕연대력(帝王年代曆)이다. 제왕연대력 에서는 거서간(居西干)차차웅(次次雄)니사금(尼師今)마립간(麻立干)등 신라왕의 고유한 명칭은 모두 야비하여 족히 칭할만한 것이 못 된다고 하면서 왕으로 바꾸었는데, 것은 유교사관에 신라문화를 이해하려는 역사인식에서 말미암은 것이었다. 
이러한 최치원의 유교사관은 유교에 대한 이해가 보다 깊어지는 김부식(金富軾)의 그것에 비해서 냉정한 면이 결여된 것이었고, 따라서 그만큼 모방적인 성격이 강한 것이었음을 나타내주는 것이었다. 제왕연대력은 오늘날 남아 있지 않아 그 내용은 알 수 없으나 가야를 포함하여 삼국의 연표와 통일신라, 그리고 중국의 연표가 들어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불허북국거상표(謝不許北國居上表)나 상태사시중장(上太師侍中狀)등에서 나타난 발해인에 대한 강한 적개심으로 보아 발해사(渤海史)는 제외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데 상태사시중장에서는 마한은 고구려, 변한은 백제, 진한은 신라로 발전한 것으로 이식하고 , 또한 발해는 고구려의 후예들이 건국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이로 보아 그가 인식한 한국 고대사 체계는 삼한-삼국-통일신라와 발해로 이어져오는 것이었고, 나아가 그 자신의 시대에 와서 통일신라 자체도 이미 붕괴되고있었던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유교에 있어서의 선구적인 역할과 아울러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한문학사(漢文學史)에 있어서의 업적이다.
그의 문학은 중국문학의 차용(借用)을 통해서 형성 되엇는데  신라의문학적 전통 속에서 성립된 향가문학(鄕歌文學)과 대립되는 새로운 문학장르를 개척한 것이었다 그리고 문장의 문사를 아름답게 다듬고 형식미가 정제된 병려문체(騈儷文體)였다.
동문선과 계원필경에 상당수의시문이 수록되어 전하고 있는데 평이근아(平易近雅)하여 당시 만당시풍(晩唐時風)과 구별되었다.  최치원은그 자신 유학자로 자처하면서도 불교에도 깊은 관심을 가져 승려들과 교유하고, 불교관계의 글들을 많이 남기고 있었다. 불교 가운데서도 특히 종래의 학문불교. 체제불교인 화엄종의 한계와 모순에 대하여 비판하는 성격을 가진 선종(禪宗)의 대두를 주목하고 있었다.
지증(智證). 낭혜(朗慧) 진감(眞鑑)등 선승들의 탑비문(塔碑文)을 찬술하고 있었으며 그 가운데 특히 지증대사 비문(智證大師碑文)에서는 신라 선종사(新羅禪宗史)를 간명하게 기술한 것으로 유명한데  신라의 불교 사를 간명하게 기술한 것으로 유명한데 신라의 불교 사를 세 시기로 구분하여 이해한 것은 말대사관(末代史觀)에 입각한 것으로 서 주목한 것은 선종만이 아니었다. 오히려 더욱 깊은 관심을 가진 것은 종래의 지배적 불교인 화엄종이었다.
화엄종관계의 글을 많이 남기고 오늘날 확인되는 것만도 20여종에 이르고 있으며 특히 화엄종사찰인 해인사에 은거한 뒤부터 해인사관계의 글을 많이 남겼다. 화엄종관계의 글 가운데는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부석존자전(浮石尊者傳)석순응전(釋順應傳)석이정전(釋利貞傳)등이 있었던 것이 확인된바 ,이로 보아 신라 화엄종사의 주류를 의상(義湘)-신림(神琳)-순응(順應)-이정(利貞)-희랑으로 이어지는 계통으로 이해하지 안는 가한다.
그리고 화엄학 이외에도 유식학자(唯識學者)인 원측(圓測태)태현(太賢)등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어 , 화엄학과 함께 신라 불교의 양대 조류를 이루었던 유식학(唯識學)도 이해하고 있었던 것으로 주목된다. 유교와 불교 이외에 기타 사상으로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도교(道敎)와 노장사상(老莊思想).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이었다. 당나라에 있을 때 도교의 신자였던 고변의 종사관으로 있으면서 도교에 관한 글을 남기고 있었던 것을 보아  그 영향을 받았을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계원필경 15권에 수록된 재사(齋詞)에서 그의 도교에 대한 이해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귀국한 뒤 정치개혁을 주장하다가 진골귀족의 배척을 받아 관직을 떠난 뒤에는 현실적인  불운을 노장적(老莊的)인 분위기 속에서  자족하려고 하는 면이 시에 잘 나타나 있다. 이러한 현실 도피적인 행동이 뒷날 도교의 인물로까지 잘못 전하여지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그가 찬술한 대숭복사비문에 의하면 예언적인 도참신앙(圖讖信仰)과 결부되어 국토 재 계획안 적인 성격을 가지고 사회적 전환의 추진력이 되고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사회에 대한 인식이나 역사적인 위치가 선승(禪僧)이자 풍수지리설의 대가였던 도선(道선)과 비슷한 점은 주목 할만한 것이다.
이처럼 유학자라고 자처하면서 유교 이외의 불교나 .노장사상, 그리고 심지어는 풍수지리설까지도 아무 모순 없이 복합하여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유교와 불교의 조화에 노력한 면이 난랑비서문(鸞郞碑序文)을 비롯한 그의 글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사상적인 복합화가 중앙의 진골귀족들의 독점적인 지배체제와 그들의 고대적인 사유방식에 반발하던 6두 품 출신의 최치원에 의하여 추진되었다는 사실은 신라 고대문화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새로운 사상 운동으로서의 성격을 가지게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말년에 와 서의 소극적이며 은둔적인 생활은 시대적인 제약성을 스스로 극복하지 못함으로서 신라 말 고려 초의 사회적인 전환기에서 중세적 지성의 선구자로 머물다간 아쉬움을 남겼다.
1020년(현종11)현종에 의하여 내사령(內史令)에 추증, 다음해에 문창후(文昌侯)에 추시(追諡)되어 문묘에 배향 되었다. 조선시대에 태인(泰仁)의 무성서원(武城書院),경주의 서악서원(西嶽書院), 함양의 백연서원(柏淵書院) 영평의 고운영당(孤雲影堂), 대구의 해안현(解顔縣)의 계림사(桂林祠)등에 제향 되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외30여 집이 있으나 기재를 성략 한다 그리고 최치원 설화는 필요한 분이 요청 시 등재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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