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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921년 경주최씨 대구대동보를 볼 수 있는 곳을 찾습니다.
이름  낙영
조회  52
날짜  2020-06-21


1921년 신유보 대구간 대동보가 비치된곳
서울시 노원구 공릉동576-19하이서울빌딩3층참판공파 종중회
사무실 02-2275-3808
회장 최근식 010-9419-2529 (전화통화 출입가능)

전국에 있는 최치원 영정 보관된 최치원 기념관-13개 영정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용정리548(진건읍독정로성지1길34)
사무총장 최병두 010-7773-1314(전화통화 출입가능)

13개 영정이 있는데 사진이 안올려지네요

고운 최치원 영정
● 정부 표준 영정_과천 국립현대미술관, 문화체육관광부지정 정부표준영정

   
남계南溪 이규선(1938- ) 은 우리나라의 전통회화에서 비구상의 세계를 개척한 선구자이다.    그는 1980년대 정부의 민족기록화 커미션을 맡아 신라 말기의 학자인 최치원의 초상화를 비단에 채색하여 족자 형태의 영정을 제작하였다. 관복을 차려 입은 최치원의 근엄한 표정을 세필로 정성 들여 묘사한 것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조선시대 후기 화가들이 남긴 초상화에서 볼 수 있는 수법을 답습하였는데, 배경을 단색으로 통일하고 관모나 옷을 그리는 방법이 평면적이라는 점, 그리고 눈을 통해서 인물의 성격과 정기를 강조하는 기법 등이 그러하다.
 


● 중앙박물관 영정_서울 국립중앙박물관

 










● 운암영당 영정_부산박물관→진주박물관


가장 오래된 최치원 영정 발견, 덧칠 벗겨내니 1793년작.신선도 판명
(연합뉴스 / 김태식 기자)
   알려지지 않은 전혀 새로운 작품이 발굴된 것이 아니라, 경주최씨 문중 소장품으로 경남도유형문화재 제187호이며 지금은 부산박물관에서 위탁 관리 중인 '운암영당 고운선생영정'을 X선 판독을 통한 정밀 분석한 결과 이런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국립진주박물관(관장 강대규)은 기획특별전 '민족의 영산, 지리산'에 대여한 이 영정을 "안전한 전시를 위해 유물 안정화 작업을 실시하던 중, 여러 차례 덧칠 흔적과 벗겨진 안료 밑면 일부에서 다른 형태의 그림선을 육안으로 확인하고는 X-선 투과 촬영조사 등 정밀조사를 실시한 결과 이 그림이 건륭(乾隆) 58년(1793)에 하동 쌍계사에서 제작됐음을 밝혀주는 화기(畵記.그림의 제작내력)를 확인했다"고 11일 말했다. 나아가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팀에 의뢰한 적외선 촬영조사도 병행한 결과 현재는 문방구를 그려놓은 영정 밑바탕에서 각각 동자승으로 추정되는 인물 그림이 그려져 있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이번에 확인된 화기에서는 이 영정을 그린 화가와 시주자 등과 관련된 내용도 보인다고 박물관은 덧붙였다.   따라서 이 영정은 "현전하는 최치원 초상화 중에서 제작시기가 가장 이른 것으로 판단된다"고 이 박물관 곽홍인 학예연구사가 말했다.   원래의 최치원 영정에서 동자승 2명이 확인됨에 따라 이 영정은 신선도(神仙圖)로 기획되어 제작됐음을 추정할 수 있게 됐다.   최치원은 삼국사기에 의하면 지리산으로 은퇴한 뒤 언제 죽었는지 알 수 없다고 했으며, 이를 근거로 후대에는 최치원이 지리산 신선이 되었다는 전설이 광범위하게 생겨났다.   원래는 신선도 일종인 최치원 영정이 지금처럼 문방구를 갖춘 완연한 유학자 영정으로 바뀌게 된 유래에 대해 박물관 장석욱 학예연구사는 "초상을 쌍계사 밖의 사당과 서원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동자승 흔적을 없애고 그 자리에다가 문방구류 등으로 덧칠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조선시대에는 주자성리학이 확고한 지배이데올로기로 자리잡음에 따라 불교나 도교적 흔적이 완연한 부분은 지우고 유학의 색채가 나는 제재를 그려넣는 일이 흔했다.   이 초상은 쌍계사에서 보존하다가 순조 25년(1825) 화개의 금천사로 옮겼고, 고종 5년(1868) 서원철폐령으로 하동향교로 옮겨 한동안 보존하다가 이후 광천영당을 거쳐 1924년에 운암영당으로 옮겼으며 현재는 부산박물관이 보관 중이다.
 
● 무성서원 영정_정읍 원촌1길 44-12

"무성서원의‘최치원 영정' 돌려주세요"
(새전북신문2012년 01월 11일 / 이종근)
   세계문화유산 등재신청권을 받는 정읍 무성서원(사적 제116호)의 최치원 영정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지역으로 반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드높다.<본지 2012년 1월 11일 1면 보도> 최치원 영정 반환 추진위원회(위원장 김연)는 지난해 3월부터 ‘고운 최치원 영정 반환 범시민 운동’을 전개, 세계문화유산 등재 신청과 맥을 같이한다면 무성서원에 볼거리가 더욱 풍부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최치원 영정 반환 추진위원회는 “무성서원에 통일신라 말 태산군수를 지낸 최치원선생을 주벽으로 신잠, 정극인, 송세림, 정언충, 김약묵, 김관 등 7현을 향사하고 있다”며 “정조 7년(1783) 하동 쌍계사에 봉안되어 있던 최치원영정을 무성서원으로 이안한다는 의견이 나와 1784년 정중한 절차를 밟아 이곳에 봉안됐다”고 역사를 말했다.   이어 “순조 25년(1825) 무성서원 강당이 소실되니 태인현감 서호순이 최치원 선생의 영정이 염려되어 다시 그려 봉안한 뒤, 쌍계사에서 가져온 영정은 함을 만들어 잘 보관하고 있었으며, 현재의 영정은 1923년 어진화가 채용신이 다시 그린 작품으로 전북도립미술관에 보관되어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무성서원에 보관중이던 고운 최치원선생 영정 2점(1784년 쌍계사에서 옮겨온 1점, 1831년 쌍계사본을 모사한 1점)을 1968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문화재 지정 목적으로 옮겨간 후 현재까지 반환하지 않고 있어 지속적으로 반환을 요청하고 있으나 이행되지 않고 있다”고 설명했다.   즉, 1968년 무성서원 원장 김상기 박사와 문화재 전문위원 최순호 박사가 무성서원에 보관된 영정을 보고 국보급이라고 찬탄하면서 문화재로 지정시켜 주겠다고 가져간 이후 지금까지 행방이 묘연하다가 최근에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는 것.   최치원 영정 반환 추진위원회는 “문화재 제자리 찾기를 위해 여러 차례 반환을 요구했지만 박물관측은 차용증과 증거 자료 등이 미비하다는 이유로 돌려주지 않고 있다”며 “뜻을 같이하는 지역민들의 힘을 모아 최치원 영정 반환 추진위원회를 결성하고 하루 빨리 영정을 찾아오고자 하는 바램으로 제현들의 협조를 구하는 바이다”고 취지를 밝혔다.
 
● 학남서원 계동사 영정_청도 구곡길 125-1,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66호

   구전에 의하면 원래 해인사에 있었던 것을 구한말 일본인들이 약탈해 갈 것을 우려하여 최씨 문중에서 해인사와 교섭하여 낮실(日谷) 마을로 옮겨 영정각을 세우고 보존해 왔다고 하니, 원래 해인사에 소장되어 있었던 본의 모본일 것으로 추정된다.   화면의 왼쪽 상단에 세로로 ‘신라최선생고운지진영’의 제기가 쓰여져 있다. 고운은 검은 사방모에 녹색 도포를 입고 오른손에 깃털 부채를 쥐고 편안한 자세로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오른쪽에는 파초선을 든 동녀가 시립해 있으며 왼쪽에는 청자 그릇에 담은 석류를 공양하는 동자상이 그려져 있는데 머리 모양이나 옷차림이 중국풍이다.   얼굴의 묘사와 옷주름의 처리기법과 바닥에 깔린 돗자리의 형태 등으로 보아 조선 후기에 와서 원본을 본 떠 그린 것으로 보인다. 비록 다시 옮겨 그린 것이긴 하나, 우리나라의 일반 초상화가 화면 속에 주인공 한 사람만을 그리고 있는데 비해, 이 초상화는 동자가 등장하는 등, 화면구성이 특이하다는 점에서 초상화의 연구에 크게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최치원의 초상화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지리산 쌍계사 본과 가야산 해인사 본에 의해서이다. 이 상은 해인사 본이며 원래 해인사 나한상 가운데 섞여 있었던 것을, 구한말 왜적의 약탈을 피하기 위해 최씨 문중으로 옮겨 놓은 것으로, 작품이 지닌 역사적 가치는 매우 높게 평가된다.    무성서원이나 청성사 등에 전하는 최치원상이 관복의 전신교의좌상인데 비해 이 본은 선명한 극채색을 사용하고 뒷배경도 진홍색을 칠해 사대부의 초상화라기 보다는 무속화적인 분위기를 짙게 풍긴다.
 
● 문창공 영당 영정_대구 도평로38길51

1990년 12월 15일 대구광역시문화재자료 제25호로 지정되었다. 최치원의 후손인 최흥원이 1865년 대구광역시 동구 지저동에 있는 계림사에 봉안하였다가 1912년 도동 766-4번지 문창공영당으로 옮긴 것이다.    재료는 극채색 견본이며 사용된 색채는 9종으로 홍, 황, 회, 녹, 감, 등(橙), 백, 흑, 담녹이다. 전신좌상으로 신선경을 배경으로 바위 위에 앉아 있고 좌우에 책을 둔 신선도 화풍의 민화이다.    최치원의 영정은 지리산 쌍계사본과 가야산 해인사본이 있다. 1783년(정조 7)에 쌍계사본은 전라북도 태인면의 무성서원으로 옮겨 고종 때 개모(改模)하였고, 해인사본은 경상북도 청도군 및 대구지방으로 옮겨서 봉안하다가 거의 같은 시기에 개모하였다.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116호인 청도 계동사의 최치원 영정은 중국풍의 문인상 형식을 취한 민화로 1882년 개모된 것이지만 이 영정은 신선상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청도의 영정보다 20년 정도 먼저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 부성사 영정_서산 산성내동길47-17

   조선 중기의 사당. 사당의 명칭은 그가 태수를 지낸 곳의 이름을 딴 것이다. 조선 선조 때 그의 덕망을 추모하던 유림들에 의해 건립되었다. 그 뒤 흥선대원군에 의하여 훼철되었다가 1907년(순종 1)에 중건되었다. 현재 후손들이 관리하고 있으며 1974년·1981년·1984년 등 여러 차례의 보수를 하였다.
 
● 학사당 영정_합천 가야산로1502-48 (홍유동계곡)





 

● 남악서원 영정_진주 죽곡길102












● 상서장 영정_서라벌대로105-12

고운 최치원이 894년 2월(진성여왕8) 진성여왕에게 시무십조를 올렸던 곳이다.
 

● 한국학중앙연구원 영정_성남 한국학중앙연구원

  최치원약사↑│최치원영정↑│최치원유적
최치원
[崔致遠]
요약 9세기 통일신라 말기의 학자이다. 중국 당 나라에서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으로 문장가로서 이름을 떨쳤으며, 신라로 돌아온 뒤에는 진성여왕에게 시무책을 올려 정치 개혁을 추진하였다. 유교(儒敎)ㆍ불교(佛敎)ㆍ도교(道敎)에 모두 이해가 깊었고, 유ㆍ불ㆍ선 통합 사상을 제시하였다. 수많은 시문(詩文)을 남겨 한문학의 발달에도 기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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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산재광주시 남구 양과동. 광주유형문화재 제10호. 최치원을 봉향하기 위해 지은 사묘이다.


1 고운 동상 부산시 해운대구 동백섬 정상에 위치해 있는 해운대는 동국여지승람 동래 고적 편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해운대는 동래현의 동쪽으로 18리쯤 떨어진 곳에 있으며 산기슭이 바다 속으로 스며들어가 마치 누에머리 같이 생겼으며 동백과 두충, 그리고 소나무, 전나무 등으로 싸여 연중 사철 한 결같이 푸르다. 남쪽으로는 대마도가 아주 가깝게 보인다. 신라시대 최 고운선생께서 이곳에 대를 쌓고 놀았다 하는데 아직도 유적이 남아 있다. 어떤 이는 최치원 선생의 자를 따서 대의 이름을 해운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를 기념하여 1971년에 해운대 동백섬 정상에 고운 최치원 선생 동상을 건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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